섬이 시가 된 사람 이생진
섬과 바다를 시로 살아낸 삶과 문학
이 글은 이생진 시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의 시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떤 세계로 나아갔는지를 살펴보려는 글이다. 가난과 배움, 섬과 바다, 성산포와 인사동, 그리고 생의 끝에서 다시 어머니에게로 향한 시인의 발걸음을 실제 작품과 함께 읽고자 한다.
섬과 바다를 시로 살아낸 삶
이생진(李生珍, 1929~2025) 시인은 1929년 음력 2월 21일 충남 서산시 읍내동에서 아버지 이우익과 어머니 최간난의 3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서산의 들과 바다를 가까이하며 자란 유년의 기억은 훗날 그의 시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평생 우리나라의 섬을 찾아 걷고, 그곳의 자연과 사람들의 삶을 시로 기록한 그는 ‘섬 시인’, ‘바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말년의 시인은 이미 사라진 고향 바다를 떠올리며 바다와 어머니를 하나의 기억 속에 놓았다. 바다는 유년을 키운 공간이면서 가족의 생계를 품었던 삶의 터전이었다.
서산- 내 고향
내 고향 서산에도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가 나의 유년을 키워줄 무렵
나는 하늘보다 바다가 좋았다
그러던 바다가 이젠 없다
사람들은 가난한 바다를 몰아내고 광활한 들을 들여왔다
그러고는 겨울마다 철새가 찾아오길 기다린다
그만큼 부유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나는 그 바다가 그리워 갈매기처럼 파닥인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일곱 식구의 밥그릇이
그 바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다
바다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나도 없다
그리움이란 없을 때 피어나는 꽃 같은 병病이다
이생진, 『어머니, 저 왔어요』, 2026, 51쪽
이 작품에서 고향의 바다는 자연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사라진 바다는 사라진 어머니와 유년, 그리고 시인 자신의 부재까지 불러온다. 이생진의 섬과 바다의 시는 이처럼 삶의 구체적인 기억에서 출발한다.
가난이 시인을 만들다
이생진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난이다. 열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맏아들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면서 공부를 계속해야 했고, 자신의 힘으로 학비와 생활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훗날 그 시절을 돌아보며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가난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난 앞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힘으로 삼아 공부와 문학을 놓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가 시를 선택하게 된 데에도 가난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도화지와 붓, 물감과 화구가 필요하지만 시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난 속에서 시를 택했고, 훗날 자신의 문학을 ‘가난의 미학’, ‘발로 쓴 시’라고 불렀다.
가난은 그에게 상처였지만 동시에 삶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었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한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
전쟁 속에서도 놓지 않은 공부
서산농림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서산 인지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1951년 입대해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부대 안에 설치된 피난대학에서 2년 동안 학업을 이어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계속됐다. 여러 사정으로 대학 공부가 중단되는 좌절을 겪었지만, 서른여섯 살에 다시 국제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해 마흔 살에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도 공부했다.
“지금도 공부하는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업 과정을 ‘동냥공부’라고 표현하면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공부와 독서는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다. 1950년대부터 1993년까지 대철중학교를 비롯해 서산여고, 성남중학교, 보성중학교 등에서 주로 영어를 가르쳤으며, 교단에서도 시인의 길을 함께 걸었다.
1955년에는 첫 수제 시집 『산토끼』를 펴냈다. 교직과 문학은 이후 오랫동안 그의 삶을 함께 이끄는 두 길이 되었다.
바다가 위로가 되고 섬이 시가 되다
가난과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앞이 막막했던 젊은 시절, 그에게 위안을 준 것은 바다였다. 바닷가에서 성장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섬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외로운 마음을 안고 바다로 나가 걷다 보면 마음이 풀렸고, 그 길 위에서 시가 태어났다.
그의 섬 방랑은 평생 계속되었다. 안면도와 간월도를 시작으로
흑산도·홍도·거문도·울릉도·우도·가파도·마라도 등 유인도와 무인도를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 곳곳의 섬을 찾아다녔다. 섬에 갈 때면 늘 수첩과 화첩을 들었다. 바다와 바람을 바라보고, 풀과 꽃과 곤충을 살피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걷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스케치하며 시로 옮겼다. 그에게 여행은 곧 창작이었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쓰는 시보다 걸어 다니며 쓰는 시가 더 시답습니다.”
그는 가난을 달래기 위해 시를 썼고, 고독을 달래기 위해 바다로 갔다. 그렇게 바다에서 만난 섬과 사람들의 삶이 한 편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다음 작품에서 바닷가의 소나무와 시인은 바다 앞에 나란히 서 있지만, 끝내 서로 다른 존재로 남는다.
바닷가에 서 있는 것들
바닷가에서 소나무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하루 종일 바다를 볼 수 있어 좋겠다’
소나무는 말 할 줄 모르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그렇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소나무는 하루 종일 바다를 봐도 소나무이고
나는 하루 종일 바다를 봐도 나다
‘나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그 물음도 그 대답도 쓸쓸하다
바닷가에서 바다가 아닌 것들은
공연한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쓸쓸하다
이생진, 『어머니의 숨비소리』, 2014, 91쪽
왜 그렇게 섬을 찾아다니느냐는 질문에 그는 “제가 고독하니까요.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아주 편해져요. 섬은 내게 시를 쓰게 하거든요. 섬에 가면 모두 시를 읊어줘요. 섬 자체가 시거든요”라고 말했다. 고독한 시인과 고독한 섬의 만남은 이생진만의 독특한 섬 문학을 탄생시켰다.
운명처럼 만난 성산포
수많은 섬 가운데 제주 성산포는 이생진 문학의 중심에 자리한다.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 찾았던 성산포에서 그는 수마포 해변과 성산일출봉, 우도의 풍광에 깊이 매료되었다. 밤에도 여관방을 드나들며 바다를 바라볼 만큼 성산포에 빠져들었고, 그 체험은 대표작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이어졌다.
1975년 윤강로·신협·이봉신·신용대 등과 함께한 동인지 『다섯 사람의 분수』에 「성산포」 연작 25편을 발표했고, 1978년 이를 바탕으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자비로 출간했다. 시집은 다방과 대학가 등에서 낭송되며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마침내 이생진이라는 이름과 성산포를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첨부된 『그리운 바다 성산포』 자료에는 이 연작의 정서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대목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삼백 육십 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첨부 자료 수록 발췌문
그의 시에서 성산포의 바다는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고독과 그리움, 가난과 죽음, 사랑과 이별, 삶의 희로애락을 품어주는 거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에게 바다는 바라보는 풍경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이후에도 가파도와 마라도를 담은 『먼 섬에 가고 싶다』, 우도를 노래한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등 섬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세계를 넓혀갔다. 성산포는 그렇게 작품 속 한 장소를 넘어 이생진의 삶과 문학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2001년에는 제주도 명예도민이 되었으며, 2009년에는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성산포 오정개 해안 일대에 이생진시비공원이 조성되었다. 시인이 평생 노래했던 시가 그가 사랑한 바다와 함께 실제 풍경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서다
이생진은 일찍부터 동인 활동을 통해 자신의 문학세계를 넓혀갔다. 1963년 윤덕구 시인과 2인 동인지 『문』을 창간해 5집까지 펴냈고, 1971년부터 분수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우이시동인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1965년부터 1969년 사이 『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세 차례 추천을 받아 1969년 등단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활동했다. 한하운의 아픔, 김현승의 고독, 박목월의 운율, 조병화의 낭만, 김삿갓의 방랑, 그리고 화가 고흐의 열정을 사랑했다. 이러한 여러 예술적 자양분은 이생진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시세계 속에 녹아들었다.
1996년 『먼 섬에 가고 싶다』로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남제주군 명예군민이 되었다. 2001년 제주도 명예도민, 2002년 『혼자 사는 어머니』로 상화시인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신안군 명예군민이 되었다.
시를 책 밖으로 데리고 나오다
이생진 시인의 문학 활동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낭송이다. 1995년부터 성산일출봉과 다랑쉬오름 등에서 채바다 시인과 2인 시낭송회를 열었고, 2000년부터는 박희진 시인과 서울 인사동에서 매월 시낭송회를 이어갔다. 2010년부터는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인사동에서 시낭송회를 이어가며, 202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자들과 시로 만났다.
그에게 시낭송회는 단순히 시를 읽어주는 행사가 아니었다. 시와 음악, 미술이 만나고, 시인과 독자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자신이 가진 시를 독자들과 나누는 것을 그는 문학적 봉사라고 생각했다. 성산포의 바다에서는 시를 쓰고, 서울 인사동에서는 사람들에게 시를 들려주었다. 섬과 도시를 오가며 시를 쓰고 나누는 일이 그의 일상이었다.
나는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퍼낸다
이생진의 시론은 소박하고 분명했다. 화려한 언어나 어려운 기교보다는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고이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옹달샘에 물이 고이듯이 고인 물을 퍼내어 썼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를 퍼낸다고 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어렵고 높은 차원의 시로 평가받기를 바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시를 읽고 감동하며 잠시라도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따뜻한 정이 담긴 시, 열정적이면서도 소박한 시, 사람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시. 그것이 그가 평생 추구한 문학이었다.
시는 결국
시는 결국 인생을 아는데 필요했다
부드럽게
때로는 서럽게
말 그대로가 아니라
말보다 심오하게
내가 그 노인을 아는데도
그 골목의 깊이를 아는데도
내가 그 처녀를 아는데도
생리를 아는 것보다
시적으로
내가 그 꽃을 아는데도
식물학적 근거로 아는 것보다
시적으로
내가 그녀를 아는데도
시적으로 알았기에 연애가 필요했다
시는 결코 무용지물이 아니었다
그 꽃을 아는데도
내가 시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 꽃을 꺾어주고 싶었다
내가 달을 안 것도
내가 별을 알고 싶은 것도
시 때문에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시는 결국 나와 너를
아름답게 묶어놓는데 필요했다
이생진, 『어머니, 저 왔어요』, 2026, 12~13쪽
이 작품은 이생진에게 시가 무엇이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시는 삶을 장식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을 더 깊이 이해하고 아름답게 이어주는 일이었다.
시가 뭔데
시가 뭔데
나는 늘 이 물음을
입에 물고 잔다
시가 뭔데
잠자리냐
매미냐
아니면 나비냐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나비가 깨꽃을 입에 물고
죽었더라
맞다 맞다
그게 시다
꽃을 물고 죽은 나비
그게 시다
나도 그랬으면
이생진, 『어머니의 숨비소리』, 2014, 83쪽
시를 정의하려는 질문은 결국 꽃을 문 채 생을 다한 나비의 모습에 닿는다. 시와 삶을 분리하지 않았던 그의 문학관이 짧고 강렬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아흔을 넘어서도 멈추지 않은 창작
나이가 들어서도 이생진의 창작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섬을 찾아 걷고, 수첩에 메모하고, 화첩에 풍경을 스케치하며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끊임없이 시로 옮겼다. 아흔을 넘긴 뒤에도 새로운 예술세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며, 92세이던 2021년에는 피카소의 삶과 예술을 탐구한 『나도 피카소처럼』을 펴냈다.
1955년 첫 시집 『산토끼』를 시작으로 평생 약 41권의 시집을 비롯해 시선집과 시화집, 산문집 등을 남겼다. 그에게 시는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평생을 걸고 걸어야 할 삶 자체였다.
그는 후배 문인들에게 시업이란 “평생 공부하며 나를 만들고, 또 만들어지는 나를 만나는 작업이자 수양”이라고 말했다. 명예나 인기를 좇기보다는 자기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묵묵히 걸으며,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데 성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섬으로 남은 시인
2025년 9월 19일, 이생진 시인은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걸었던 수많은 섬길과 바닷길,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바라보았던 파도와 노을,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길어 올린 시는 우리 곁에 남았다.
그의 마지막 시집은 어머니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가난한 맏아들로 출발해 수많은 섬을 걸었던 시인의 긴 생애는 결국 어머니 앞에서 “네”라고 대답하는 아들의 자리로 돌아온다.
무덤이 매력적인 것은
- 어머니, 저 왔습니다
차츰 나에게 무덤이 매력적인 것은
그곳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너 왔니?”
“네”
“지금도 시를 쓰고?”
“네”
벌써
지하에서 10년
“여기도 편하다”
늘 편하다는 말씀
“애들은 잘 놀고?”
“네”
내 대답은 ‘네’ 한 마디
그것밖에는 드릴 것이 없는 아들의 가난
드시지도 않는 술은 왜 들고 왔을까
“올 적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마라”
“네”
어머니 앞에서는 빈손도 배부르다
떨어져 살던 어머니 곁으로 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저도 곧 올게요” 하면
“서둘지 마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생진, 『어머니, 저 왔어요』, 2026, 26~27쪽
가난 때문에 시를 택했고, 고독 때문에 바다로 갔으며, 바다에서 섬을 만났다. 그리고 그 섬을 평생 걸으며 자연과 사람과 삶을 시로 기록했다.
“섬 자체가 시”라고 말했던 시인 이생진. 그가 걸었던 섬길은 한 편 한 편의 시가 되었고, 그 시들은 다시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섬이 되었다.
섬을 찾아가는 일이 곧 시를 찾아가는 일이었던 시인, 바다에서 인간의 고독과 그리움을 발견했던 시인, 평생 걷고 쓰고 읽으며 독자들과 시를 나누었던 시인. 섬과 바다를 노래한 이생진의 문학은 한 시인의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 우리나라의 섬과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또 하나의 문학적 지도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섬과 바다처럼 이생진의 시 또한 세대를 건너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출렁일 것이다.
이생진 다큐 시나리오《섬이 시가 된 사람, 이생진 2026. 김명중 시인 作에서 발췌》